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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수필 | [역사에세이] 오시비엥침. 인간의 악이 광기로 변한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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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인회 작성일10-10-04 16:20
조회3,13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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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 815일 광복을 맞은지 올해로 65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우리 역사 속에는 일제 식민지시대를 거쳐온 어두운 그림자가 남아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35년 동안 유린과 수탈의 역사를 지나온 우리이기에 우리와 비슷한 시련을 겪은 나라들에게 동병상련의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중국과 일본 사이에 끼어 어려움을 겪었던 우리나라처럼 중부유럽 발트해에 면한 폴란드는 러시아, 독일 사이에 끼어있는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고난의 역사를 관통한 전력이 있습니다. 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러시아에게 침공을 당했던 폴란드는 1939년 독일이 소련과의 불가침 조약을 깨고 침공을 감행하여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는 불행한 나라가 됩니다.  그리고 인류 역사상 가장 처참한 인종말살의 공간이었던 오시비엥침’(폴란드어 Oświęcim 독일어 Auschwitz)이라는 최악의 집단학살 수용소가 생기게 됩니다.

 

인간성 상실의 처참한 결과

오시비엥침은 폴란드 크라쿠프에서 서쪽으로 54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작은 공업도시로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 극에 달했을 당시 이곳에 최악의 강제수용소가 세워졌습니다. 1940년 건설 당시에는 정치범을 수용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지리적으로 유럽 각지에서 기차로 사람들을 실어나르기 쉽고 인구 밀집지역에서 벗어나 있다는 입지 조건 때문에 유태인들의 강제수용소로 변하게 됩니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 <인생은 아름다워> 등에 등장하는 강제수용소가 바로 이곳 오시비엥침입니다. 1945 127일 소련군이 들어와 전쟁이 끝나자 폴란드 국회는 인류의 죄악을 확인할 수 있는 이 곳 수용소를 박물관으로 만들기로 결정했습니다. 인간성 상실의 처참한 결과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폴란드인은 14세가 되면 이곳을 방문해야하는 것이 의무로 정해져있습니다. 나치는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소련을 침공하면서 *하인리히 히믈러가 SS 특별행동부대(SS Einsatzgruppen)  A, B, C, D 4개 지대로 편성하여 진격하는 국방군의 뒤를 따라 소련 영내에서 각종 처형 임무에 투입합니다. 이들이 처형한 이들은 유대인, 폴란드인, 로마인, 공산주의자, 반 나치활동가 등이었는데 처음에는 총살로 처형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이들을 처형하게 되면서 뜻하지 않은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처형 속도, 탄약 부족, 부대원들의 심리적 부작용 등의 문제가 부각되면서 나치는 처형자들을 강제수용소에 보내 독가스로 살해하는 방법을 채택하게 된 것입니다. 살인공장이라고도 할 수 있는 오시비엥침에 보내진 이들은 굶주림과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다가 수 개월 내에 죽거나, 가스실로 보내져 살해됩니다. 나치는 2차 세계대전 동안 600만명(유럽 전체 유대인의 80%)을 학살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28개 민족의 150만명이 오시비엥침에서 죽어갔다고하니 살인공장이란 명칭이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과로, 질병, 굶주림 속에 스러져간 사람들

유럽 각지에서 실려온 유대인들은 노동이 가능한 젊은이들은 강제수용소로 보내지고 노인, 어린이, 환자 등은 그자리에서 살해되었다고 합니다. 강제 노동자들도 주기적으로 건강 상태에 따라 선별되어 처형하였으며, 일부 사람들은 의학 실험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오시비엥침 박물관견학을 시작하는 입구에는 “ARBEIT MACHT FREI(일하면 자유로워진다)“라는 문구가 걸려있는 것이 눈에 띄는데 이곳 수용자들이 직접 만들었다는 이 구조물은 나치의 기만적인 태도를 비꼬기 위한 최소한의 저항의 상징으로 보입니다. 오시비엥침에는 28개의 수인동이 있는데 이곳에 들어서면 수용자들이 도착하자마자 찍은 증명사진을 접하게 됩니다. 수용자들이 탈출할 경우 색출을 위해 3가지 포즈의 사진을 찍고, 수용소에 온 이유에 따라 갖가지 삼각형 주기표를 몸에 새겼다고 합니다. 희생자들의 사진에는 이들이 수용된 날짜와 사망한 날짜가 기록되어 있는데 대부분 수용소에 들어와서 2~3개월 내에 사망한 것으로 나타나 오시비엥침의 비참한 생활을 상상할 수 있게 합니다. 각각의 수용소를 돌아본 후 가장 충격적인 전시공간이 나타나는데 유리벽 속에 희생자들에게서 빼앗은 옷, 신발, 그릇, 안경 등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모습은 섬뜩하기 그지 없습니다. 특히 카펫과 가발을 만들 목적으로 모아놓은 여자들의 머리카락 더미를 지켜보면 슬픔이 아픔이 될 정도로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오시비엥침의 마지막 여정은 수많은 사람을 학살한 가스실이었는데, 하루에 1,500~2,000여명이 처형되었고, 시체는 소각되었다고 합니다. 벌써 70여년이나 지난 일이지만 가스실에서는 수많은 이들이 고통 속에 세상을 떠나서인지 그들의 목숨을 앗아간 독가스의 악한 기운이 남아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묘한 기분에 빠져들었습니다.

 

비참함과 절망의 끝. 비르케나우

오시비엥침을 돌아본 것만으로도 이미 오래전 세상을 떠난 이들의 영혼이 바로 옆에서 느껴질 정도로 가슴이 시려오는데 가이드가 또다른 대규모의 강제수용소로 이동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2의 아우슈비츠라고 불리는 비르케나우(Birkenau) 1941 11월 오시비엥침의 유대인 수용소가 인원이 넘치자 3km 떨어진 브제진카 마을에 오시비엥침의 10배 크기로 제 2 수용소로 만들어진 곳입니다. 나치의 만행을 그린 영화에 나오는 모습들은 바로 이 비르케나우에서 많이 차용한 것이라고 합니다. 버스를 타고 이동한 비르케나우는 겨울이어서 더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몰라도 오시비엥침은 사치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막막함이 밀려오는 곳이었습니다. 벽돌로 지어진 오시비엥침에 비해 폴란드의 칼바람을 그대로 맞을 수 밖에 없는 나무 널빤지로 지어져 한기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숙소와 화장실을 쳐다보니 할 말을 잃을 지경이었습니다. 황량한 벌판(175ha) 300동 이상의 목조 막사가 끝도 없이 서있는 모습은 말 그대로 충격이었습니다. 비르케나우를 둘러본 후 철도 끝에는 대형 국제위령비가 세워져 있는데 그 옆에는 20개국의 언어로 된 작은 위령비들이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얼마나 많은 나라의 사람들이 광기에 의해 희생되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나치는 전쟁이 끝나기 전에 자신들이 저지른 엄청난 범죄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노력했지만, 오랜 시간 광범위하게 진행된 만행을 덮어버리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 같습니다. 폴란드는 다시 이러한 비극을 되풀이하지 말자는 의미에서 똑바로 쳐다보기괴로운 현장을 과감히 유물로 보존하는 결단을 감행했으며, 독일 역시 폴란드의 노력에 동참하기 위해 매년 예산의 일부를 지원하고 있다고 합니다.

 

오시비엥침과 비르케나우의 비참한 현장을 확인하고도 폴란드와 유럽의 저력이 부럽게 느껴지는 면이 없지 않았으니, 그것은 반 인류적 범죄를 자행한 전범을 대하는 그들의 단호한 자세와 집요

하게 추적하여 책임을 묻는 역사의식입니다. 우리나라는 해방을 맞이하는 과정에서 동족을 배반하는 친일 행위로 부와 권력을 축적한 세력이 다시 친미 집단으로 돌변하여 변함없이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송병준, 이완용 등 친일파 후손들의 조상 땅 찾는 일이 버젓이 가능한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역사는 지나갔지만, 끝없이 반복되는 생리를 돌이켜봤을 때, 뼈를 깎는 반성과 제대로된 평가 없이 유야무야 넘어간 과거는 언젠가는 반드시 되풀이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돌이키기 괴롭다고 묻고 지나간 과거가 언젠가는 부메랑처럼 돌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여, 지금이라도 아프지만 과거를 청산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여야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부록] 하인리히 히믈러(Heinrich Luitpold Himmler) 1900~1945

독일 뮌헨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하인리히 히믈러는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패배에 분개하여 우익 사병 집단인 자유군단에서 활동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는 1930년대와 40년대 SS로 약칭되는 친위대 전국지도자로서 SS와 게슈타포를 지휘했다고 합니다. 유대인 학살의 실무를 주도한 최고 책임자로 나치 강제수용소와 SS 특별행동부대(SS Einsatzgruppen)를 창설하였고, 1933 3월 최초의 강제 수용소 다하우 수용소를 설립하였으며, 이후 대량 학살과 집단 학살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인종주의 나치 이데올로기에 대한 광신적인 믿음을 가진 것으로 전해집니다. 하인리히 히믈러는 600만에서 1200만에 달하는 사람들을 학살한 책임이 있고, 특히 유대인 학살을 목표로 삼았으며 가스실을 고안한 장본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연합군에 의해 주요 전범으로 체포되자 1945 523일 음독 자살로 생을 마쳤다고 합니다. 수많은 무고한 이들을 처절하게 괴롭히다가 목숨을 빼앗은 그가 속죄도, 반성도, 고통도 없이 죽음을 맞았다는 사실이 불공평하게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   

 

, 사진 이정선

[이 게시물은 강창원님에 의해 2017-12-14 19:53:21 문화의 향기[여행/수필]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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